인류의 스승, 공자
춘추시대 노라나에서 태어나다(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
공자님은 키가 9척 6촌에 달하며 꺽다리라고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께서 홀로 공자님을 키우셨다고 합니다.
공자님은 사생아였기에 공씨 집안에서 자손으로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공자님은 16세에 모친이 세장을 떠나자 3년 상을 마친 뒤 부친 묘소 옆에
안장하였다고 합니다.
공자님은 기원전 533년 19세에 송나라의 병관씨의 딸과 결혼하여 20세에
아들 리를 얻었다고 합니다.
천하무도의 혼란을 딛고 인류에게 문명의 빛이 디어준 유교를 처음
으로 세상에 드러내어 찬연히 밝혀준 인물이 바로 공자입니다.
중국 춘추시대 말기 노나라에서 태어나 위대한 사상가이자 교육
자로서 그리고 정치가로서 활동하였던 공자의 이름은 구이며
자는 중니라고 합니다.
공자님께서는 기원전 551년 노나라 추읍에서 부친 숙량흘과
모진 안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청빈하고 강직한 성품의 부친은 노나라를 지키던 훌륭한 장수
였고 송나라 귀족의 후예였습니다.
공자님의 가계는 훌륭했으나 부친이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까닭에
집안 형편은 가난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어린 나이에 이미 제기를
펼쳐 놓고 예를 갖추는 놀이를 하셨던 것으로 모친이 바르고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자님은 15세 되던 해부터 본격적으로 학문에 뜻을 두고
배움에 몰두하였습니다.
공자님께서는 뚜렷하게 정해진 스승이
없었는데, 다만 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인간사가 그의
스승이었으며 학문의 대상이기도 하였습니다.
공자님은 늘 도탄에 빠진 백성을 걱정하였으며, 그들을 위한
배움의 체계를 세워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고 이를 위한 노력을 평생토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했기에 한 고을을 다시리는 직책을 맡았을 때도
정치를 잘하여 많은 백성들에게 신임을 받기고 하였으며,
노나라에서 대사구(법무부 장관에 해당하는 직책)를 맡았을
때에는 올바른 판단과 확고한 신념으로 노나라의 정치를
바로잡아 단기간 내에 국가의 기강을 확고히 다져 놓기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웃나라인 제나라에서 공자님의 뛰어난 능력을 두려워
하고 시기한 나머지 간교한 계랴가을 꾸며 이를 방해하였습니다.
제나라의 계략에 넘어간 노나라의 임금은 마침내 혼란에 빠져
백성 돌보기를 소홀히 하게 되었으며, 이를 본 공자는 벼슬에서
물러났다고 합니다.
열국을 주유하다
야인의 생활로 돌아온 공자는 이제 단지 노라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타락과 혼돈 속에 싸여 있는 천하의 백성들을 생각하게 되었고
이러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커다란 뜻을 세우고 이를 샐행에
옮기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공자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갖은 고난과 역경을 헤치며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고,
제후국의 대신들과 임금에게 올바른 정치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도록 설득하였다고 합니다.
공자님의 노력에는 많은 고난이 뒤따랐는데 광 땅에서는 포악한 양호로
오인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으며, 양식이 떨어져 고생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공자님은 수많은 위험과 고난 속에서도 사문을 지키는 목탁이 되어
헌신했지만 생존 시에는 그 빛을 발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공자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공감했지만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혀 막상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
이었습니다. 이에 한계를 느낀 공자님은 다시금 고국인 노나라로
돌아와서 후세에게 유교의 진수를 전파하여 줄 제자들을 양성하는 데
전념하였습니다. 공자님은 많은 유교 경전을 다듬고 저술하여 훗날
유교가 인간을 구원할 위대한 가르침으로 자리 잡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유교를 집대성하다
공자님이 집대성한 유교는 인간을 가장 존중하며 이에 바탕하여 귀천
의 모순을 바로잡고, 인의의 정신을 고양하여 수신과 치평의 도를 세우려고
했던 구세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공자님은 고국의 노나라에서 이루지 못하고
여러 나라를 순방한 후 만년에 이르러 고국으로 돌아와 [시경]과 [서경]을
정리하고 예와 악을 발로 잡았으며 [춘추]와 [주역]의 [10익]을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공자사상의 진수는 사후에 제자들이 수집 정리한 [논어]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
합니다. 공자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3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제자로는 72현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안회가 가장 뛰어났으나 불행히도 공자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에 공자님의 도는 [대학]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증자에게
전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증자는 공자님의 제자 중에서 비록 노둔하나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물로 [논어]에서 묘사되고 있는데, 그는 비록
선천적으로 뛰어나지 못하더라고 누구나 덕을 쌓고 노력한다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유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잘 구현한 사람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증자에게 전해진 공자의 도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에게 전해지는데,
자사는 현재 사서의 하나인 중용을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자사 이후 전국시대의 이눌인 맹자에게 유교의 전통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맹자는 공자님의 주요한 사상인 인과 의를 확충하여
'인의지도'의 체계를 세웠습니다. 맹자는 백성을 귀하게 여기고
백성과 더불어 동락하는 왕도정치를 당시 여러 제후에게 제시하였고,
무력으로 백성을 따르게 하는 강압적인 패도정치를 반대하였습니다.
특히 맹자는 성선설을 강조하였습니다. 맹자는 인간은 날 때부터
하늘의 착한 기운을 갖고 태어난 존재라고 파악하여 유교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주체적인 도덕실천 가능성을 최대한
넓혀 놓으셨습니다.
논어 學而第一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배우고 때때로 이를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아니해도 화내지 않으면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공문사성 (안자, 증자,자사자,맹자)
공문십철
송조육현
아국십팔현
다음 차에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묺헌] 성균관 안내 책자.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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